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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자신의 ‘쓸모’를 인식해야
작성자 이** 작성일 2021-06-02 조회수 280

1968년 파리의 학생들은 권위주의적인 기성 체제에 반발하며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로!”,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쳤다. 이 운동은 자율의 확대, 다양한 가치관의 존중, 창조적 상상력의 분출로 이어지며 근원적인 사회문화적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 68혁명을 빼고는 오늘의 유럽을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언급된 사건이기도 하고,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이며, 50년도 더 지난 일이기 때문인지, 당시의 구호를 되뇌어 보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 청년들이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외친다면 어떨까. 아마도 염려가 앞설 것 같다.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사회화시킬 책임이 있는 기성 세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세상은 청년들을 망가뜨릴지도 모르는 온갖 함정과 유혹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1968년에도 세상이 위험하긴 마찬가지였겠지만) 현대 사회는 ‘정말’ 위험하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는 쉽다. 이제 그들은 이른바 ‘꼰 대’로 지목 당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잔소리나 훈계가 불편하다고들 하지만 사실 ‘꼰 대질’과 ‘조언’은 거기서 거기다. 전자는 듣기 싫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주관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쯤해서 ‘듣기 싫다’라는 수동적 거부가 아니라 청년들이 나서서 소리 치고 싶은 구호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어느 시대나 청년들은 불안하다. 그들의 삶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앞날의 가능성은 불확실성의 다른 말이다.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청년 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불안과 직면하는 방법일 것이다. 68혁명 당시의 청년들은 무한한 상상력을, 기성의 권위에 속박당하지 않을 자유를 선언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선택이자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오늘날 불안의 내용과 원인에 대해 여러 가지 진단이 있겠지만, 이반 일리치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사회적 규모로 벌어지는 만족감의 상실”이라고 진단한 사태를 주요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돈은 “측정될 수 없는 것이면 무엇이든 평가 절하”하기 때문에, 돈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은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발달한 과학 기술도 인간적 여유를 제공하기보다는 비인간적 과로를 조장한다. 사무기기가 자동화될 수록 혹사당하고, 초고속 교통이 발달할 수록 시간은 부족하며, SNS에 연결될 수록 인간관계에 무능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육은 받을 수록 쓸모없어지게 되는데, 학생들이 가파르게 서열화된 기준에 따라 더욱 엄정하게 상대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돈벌이와 연결되지 않는 교육은 ‘사람을 쓸모없어지게 만드는 교육’이 된다.

 

자기가 바라는 삶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만족감을 되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쓸모’를 새롭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으로 인식하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행복하게 살기는 어려운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더 열렬하게 자신만의 존재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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