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나에게로 가는 길 | |||||
| 작성자 | 이** | 작성일 | 2017-10-17 | 조회수 | 666 |
|---|---|---|---|---|---|
|
물었는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함구라 하고, 묻지 않았는데 내 말을 다해주는 것은 수다라 한다. 함구하면 세상과 끊어지고 말이 많으면 자신을 잃고 만다. -김매순-
교양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하루에 *톡을 열번 이하로 여는 사람 손들어 봐요?” 70여명의 학생 중에 딱 한 명만 손들었다. 어쩌면 손든 학생은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2G폰을 고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학생은 모두 하루에 열번 이상 *톡을 열어 본다는 말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그리고 걸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슬쩍 곁눈질 해 보면 게임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계속 자판을 치는 것으로 보아 *톡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내게 온 메세지도, 내가 보내는 메세지도 대부분이 중요하지도 긴급하지도 않다. 지금 읽고 지금 답변하지 않아도, 아주 안 해도 그만인 것이다. 어떤 회사에서는 상사가 업무시간이 지나서 업무지시를 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니 회사의 업무조차도 다음날 또는 주말을 지나 얼굴을 맞대고 하여도 중요성이나 긴급성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꼭 필요한 일처럼 열심히 누군가와 짧은 문자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와 계속적으로 연결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불안해서인 것 같다. 어떻게 아는가? 내가 왜 *톡을 열 번 이상 여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이다. 친구, 학과 선후배, 동아리 멤버, 동창생, 이런 저런 별로 깊지 않은 관계의 사람들에게까지 연결된 *톡방에서 빠져나와 버리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끊는 행위, 즉 나의 고립을 선택하는 것이다. 두려운 것은 단절이다. 쉬지 않고 이 방 저 방에서 한 번에 수십 개씩 의미 없는 내용의 문자를 날리며 나의 고립을 거부하고 관계 속에 나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많은 사이버상의 관계 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언제인가 우리의 정체성을 희석시켜 버렸다. 절대적 존재로의 나는 어디론 가 사라져 버리고 관계 속의 한 명으로만 남아 버렸다. 빅데이터로 SNS를 분석하면 결과로 나오는 ‘나’는 관계에서 한 노드로 정의되지 나의 진정한 속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다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쌓아가는 나는 더욱 나를 미궁 속에 밀어 넣어 찾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그 어디선가 잃어버린 것이다. 보잘 것 없을 것 같은 나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다 할지라도 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끊임없이 *톡을 읽고 답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며 나를 보아야 한다. 나의 생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영영 찾지 못할 ‘나’로 인해 어딘지 모를 지점에 서서 황망해 하는 빈껍데기의 ‘나’를 되돌려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과학부 한인섭 교수
<저작권자 ⓒ 울산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이전글
- '침묵'과 '소통'
-
다음글
- [길토래비] 사이시옷 표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