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과 '소통' | |||||
| 작성자 | 이** | 작성일 | 2017-10-17 | 조회수 | 5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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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478호를 발간하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단어가 있다. 바로 ‘침묵’과 ‘소통’이다. 정기자들의 작업 지도를 위해 인터뷰지를 들여다보던 중 한 기자가 취재한 ‘침묵 서비스’에 혹하고 말았다. 말을 걸지 않는 서비스라니! 이 얼마나 ‘친절한’ 서비스인가. 나는 예전부터 불필요한 소통을 이어갈 바엔 침묵을 택하곤 했다. 침묵은 종종 소통의 단절이라 여겨지지만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침묵만큼 달콤한 단절도 없다. 누구보다 소통에 앞장서야 할 신문기자가 침묵에 관심 갖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운 좋게도, 나는 이번 신문을 만들면서 내 고정관념을 깨부술 값진 경험을 하게 됐다. 꽤 오랫동안 침묵을 소통의 반대어라 여겼던 생각을 바꿔 놓는 경험이었다. 정기자들과 신고리 건설 중단·재개 맞불집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던 도중 내 시선을 이끈 한 사람이 있었다. 탈원전 찬성 집회 무대 위 바쁜 손을 움직이고 있었던 수어사였다. 노래 소리와 자동차의 클락션 소리,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뒤덮인 그 곳에서 그는 누구보다 ‘조용하게’ 또 ‘선명하게’ 소통하고 있었다. 손으로 말하는 언어, 수어의 존재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새로운 사실을 접한 아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무 당연하게도 침묵과 소통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 생각해왔던 것이다. ‘누군가에겐 침묵의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소통의 시 간이라는 것을 늦게도 깨달았구나’ 라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내가 세운 기준과 틀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늘 나의 시각에 남을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순간의 깨달음을 얻었던 이번호 작업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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