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과 각색 사이…영화 군함도, 도마 위에 오르다 | |||||
작성자 | 김** | 작성일 | 2017-09-05 | 조회수 | 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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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개xx들아 우리가 뭘 잘못했어?!” 영화 <군함도>에서 강제 노역을 당한 어린 학생이 일본군에게 한 말이다. 이 학생을 포함한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은 군함도 탄광에 끌려가 온갖 인권 유린을 당하며 일본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노동력 착취를 당했다. 황정민의 “집에 좀 가자”란 애절한 한 마디는 관람객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군함도>는 집에 가는 것이 당연할 수 없었던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군함도>를 본 관람객들의 평은 역사 왜곡 영화라는 비판과 함께 진짜 군함도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올렸다는 것으로 나뉘었다. <울산대신문>은 상반된 평가로 논란이 된 <군함도>를 통해 역사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과 관람객으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다뤘다. 군함도의 역사 군함도는 나가사키에 있는 조선인을 끌고 가 강제로 석탄 채굴을 시킨 지옥도로 유명하다. 군함도는 군함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공식 명칭은 ‘하시마’이다. 군함도는 면적 0.063제곱킬로미터로 야구장 두 개의 크기이다. 미쓰비시 회사는 1890년에 이 섬을 매입했다. 이 회사는 좁은 군함도를 넓히기 위해 시멘트를 뿌렸고 이어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인 7층 아파트를 세웠다. 직책이 높은 일본인의 집은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의 숙소보다 훨씬 높은 지대에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이 최초의 아파트라고 자랑하는 광부들의 주택이 있다.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은 지대가 낮아 늘 파도가 들이치는 방파제 끄트머리에 살았다. 이는 마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존재했던 신분 차이를 상징하는 듯했다. 1943년부터 1945년 사이 군함도 탄광에서는 약 500명~800명의 조선인 강제 노역자가 군함도 탄광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리라고 추정된다. 이들은 품질 좋은 석탄을 캐기 위해 지하 1,000m 아래까지 내려가야만 했고 그곳의 경사는 60°에 달했다. 탄광 깊이가 깊어질수록 공간이 좁아져 어린 학생들이 들어가야 했다. 가스에 노출돼 폭발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며 쉴 곳도 없는 공간에서 하루 16시간을 일했다. 제공된 식사는 보통 비료로 쓰는 콩깻묵 주먹밥 2개가 전부였다.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은 군함도 탄광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생활했다. 지옥 같았던 군함도는 1974년 1월 폐광 이후 무인도가 됐다. 현재 군함도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철강?조선?석탄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유산이 됐다. <군함도>에 대한 상반된 시각 <군함도>가 다른 역사 영화보다도 논란이 된 이유는 일본 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군함도를 유네스코에 등재하고 홍보하는 일본 정부에는 식민지의 희생을 덮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일본 정부는 1943년~1945년의 강제 노역 역사를 가리기 위해 세계유산 대상 기간을 1850년~1910년으로 한정 지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강제 노역에 대한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던 와중 <군함도>는 개봉됐다. <군함도>는 개봉 전부터 소재 자체만으로 국제적 관심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군함도>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지만 개봉 이후 예상과 다르게 혹평이 쏟아졌다. 관객들은 군함도의 역사적 사실이 잘 표현되길 바랐지만 류승완 감독은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이 영화를 제작한 첫 번째 이유는 아니었다”고 밝히며 실망감을 자아냈다. 많은 이들이 영화에서 원했던 방향과 류 감독이 의도하려 했던 방향이 달라지면서 관객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시작됐다. 많은 혹평 중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역사 왜곡’이다. <군함도>에서는 조선인 강제 노역자가 한데 모여 촛불을 켜는 모습과 과일을 먹는 등 실제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을 그렸다. 일본인의 잔혹한 모습을 뒤로한 채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강제 노역자를 더 악하게 표현한 모습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군함도 탄광에서 핍박받는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의 고통을 희석했다는 비판이 빗발쳤다. 정해권(생명과학·4) 학우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와 관련된 만큼 조선인 강제 노역자의 아픔을 더 강조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며 “후반부로 갈수록 탈출영화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군함도>에 대해 혹평이 쏟아졌지만 호평 또한 존재한다. 영화를 통해 군함도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군함도>가 제작 발표되면서 군함도의 역사는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정 학우는 “<군함도>를 통해 군함도 탄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며 “SNS에 올라오는 영상은 거의 다 봤다”고 말했다. <군함도> 역사 왜곡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한 시민도 있다. 김지수(24) 씨는 “역사 왜곡이란 말보다는 각색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 같다”며 “영화는 창작물이기에 어느 정도 각색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군함도 전문가 A 교수는 “어떤 식으로 영화를 각색했다고 미리 밝히면 더 좋을 것 같다”며 “역사적 고증은 역사 영화에서 필수이다”고 강조했다. 역사 영화와 관람객이 나아가야 할 길 지금까지 <암살>, <명량>, <덕혜옹주> 등 한국 역사를 모티브로 한 영화가 많이 개봉됐다. 지난해 8월에 개봉한 역사 영화 <덕혜옹주> 또한 <군함도>와 비슷한 이유로 파문을 일으켰다. 영화 속 덕혜옹주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한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는 역사 왜곡과 창작물로서의 각색 사이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 마련이다. 한 역사 전문가는 “우리는 역사 영화가 사실을 토대로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관람객들이 창작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고 덧붙였다. A 교수는 “창작자가 역사 영화 제작 시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을 한 상태에서 픽션이 더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관람객들은 역사 영화로 우리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현진 기자 khj970923@mail.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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