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삼재
“지독한 삼재였다.” 아빠는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삼재’라고 불렀다. 아빠는 설이 되자 어깨에 얹은 짐을 털어놓은 듯이 가뿐하게 “이제 삼재가 지났구나.” 라고 말했다. 나는 핸드폰으로 ‘58개띠 삼재’를 검색했다. 아빠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2016년이 삼재라는 검색결과가 나왔다. 나는 삼재란 단순히 마음에 달렸거니, 언제나 찾아오는 불운들이 삼재라고 생각하는 심리에 홀려 꼬리의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가 삼재가 끝났다고 하면 끝난 것이다.
멀쩡히 정지해있던 오토바이를 옆에서 누군가 들이받은 이후 아빠의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상대는 자기는 가난해서 결혼도 못하고 노모를 모시고 산다며 보상은 해줄 수 없지만 선처를 부탁한다고 매일같이 빌었다. 결국 죄 없이 몸만 축난 아빠는 보상도 받지 못한 채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사고 이후 아빠의 체력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곤한 날이면 피가 찼는지 복수가 찼는지 모르는 옆구리는 더욱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젊었을 때는 A급 일꾼이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아빠는 이제 공장의 눈엣가시가 되어버렸다. 늙고 병든 일꾼, 한 달을 꼬박 입원날짜로 보내고, 퇴원해서도 힘을 쓰지 못하는 아빠에게 공장에서는 이만하면 오래 기다려줬다는 듯이 해고를 선고했다. 집에 돌아온 아빠는 비에 잔뜩 젖은 우비를 힘없이 내려놨다. 바닥 위로 빗물이 고여 주르륵 흘러갔다. 아빠는 한참 가만히 있다가 “우리 이제 굶어 죽겠다.”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날도 있지.”하고 걸레를 들고 바닥을 닦았다.
선영이는 교통사고가 난 사람의 몸이 축나는 이유를 시간이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람은 앞으로 가고자 하는데 사고가 나면 뒤로 밀려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의 시간이 어긋나버리기 때문에 사람이 아프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우리 아빠는 정지해있었는데?”라고 물었다. 선영이는 그래도 사람은 법칙처럼 무조건 앞으로 가게 된다고 했다. 나는 정지되어 있었던,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아빠의 시간이 어디까지 날아가 버린 것일까를 생각했다. 아빠의 시간은 몸 속에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한평생 성실했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은 상태에서도 아빠의 시간은 떠밀려온 시간을 만회하려고 바쁘게 나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는 쉬는 날들을 못 견뎌 했다. 한평생을 일을 했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 날들이 노동인양 불편해했다. 아빠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회식이 아니면 나가는 일이 없었고 회사가 끝나면 늘 집으로 바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집에서도 아빠가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아빠는 뜻하지 않게 생긴 휴가동안 회사를 다니던 매일처럼 여섯시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켜고 삼십분을 있다가 신문을 읽고, 밥을 먹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일을 하던 시간 동안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누워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다 잠에 들거나 컴퓨터 고스톱을 치는 것을 반복했다. 멍하니 있는 아빠에게 괜히 책이라도 권해보면 아빠는 안경을 쓰고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늘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고개를 뒤로 쭉 빼서는 한 페이지를 채 읽지 못하고 “아이고 나는 못 읽겠다.” 하고 도로 물러서 주곤 했다.
문득 아빠를 보다 보면 ‘아빠는 젊은 날의 꿈이 뭐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아빠를 보고 학자체질이라고 했다. 사람이 살다보니 몸쓰는 일을 하지만 아빠는 척 봐도 머리를 쓰는 일을 해야 했다고, 그랬다면 아빠의 삶이 행복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책을 읽는 아빠를 본 적은 없지만, 아빠는 항상 뉴스와 신문을 보고 있었고, 어려운 한자도 척척 말할 수 있었다. 불경하게도 그때부터 아빠가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연민에 가까운 감정들에 한 번씩 휘말리고 말았다. 예전에 아침방송에 ‘마음이 늙지 않는 법’이 나왔다. 다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기억나는 한 가지는 ‘늘 배우고자 한다.’였다. 아빠가 뿌듯한 듯이 “나는 늘 배우려고 하니까 마음이 천천히 늙겠다.” 한 것이 머릿속에 불씨가 박힌 듯이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도 아빠를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아빠는 늘 죄지은 사람처럼 굴었다.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은 아빠가 가장 되고 싶지 않은 위치인 것 같았다. 아빠는 귓가에서 누군가 비난하기라도 하는 듯이 괜히 “돈도 못 버는데……” 하는 말을 말끝에 붙였다. 두 끼를 라면으로 때우지 말라는 말에도 “라면이면 적당하지. 돈도 못 버는데……” 라고 말하고, 회사 끝나는 길에 태우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에도 “돈도 못 버는데 당연히 데리러 가야지.” 하고 멋쩍은 듯 허허 웃고 출발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마 하면서 아빠가 가는 길을 따라 나섰다.
새로 들어갔던 회사는 사장이 돈을 들고 날라버렸다. 오늘도 아빠는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큰일 났다. 우리 가족 굶어 죽게 생겼다.”라고 말했다. 머릿속에 잠시 내일 납부해야 하는 등록금이 생각났다. 헥헥 거리며 눈치를 보는 강아지 숨소리만 현관을 가득 채웠다. 아빠는 황당한 듯 헛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2주 전까진 형님아우 하고 지낸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하던 사장이었다. 사장은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했다. 나는 그 와중에 3세계도 아닌 미국으로 도망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퇴직금까지 모두 들고 날아갔다는 그 사장은 남의 돈으로 기회의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요상했다. 남의 돈으로 잘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양심이 없고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야 오히려 잘 사는 세상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사장의 불운을 비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 나는 그냥 사장에게도 삼재가 오소서 하고 빌었다.
나는 부엌에 누워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어둠 속에 알알이 걱정이 박혔다. 나는 어둠을 빤히 보다가 눈꺼풀에 걸려 맺힌 걱정들이 쏟아져 내릴까봐 이불을 둘둘 말고 엄마 아빠가 내다보이는 부엌에서 자곤 했다. 아빠는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엄마에게 “말을 해야 하나…”하고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엄마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빠에게 당신 마음 가는 대로 해.”라고 했다. 아빠는 자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잠든 엄마도 한숨을 쉬었다. 나도 괜히 한숨을 쉬었다.
내년이 되면 아빠의 삼재는 끝날 것이다. 언젠가 아빠가 다신 찾아오지 않을 이 지독한 삼재를 진저리치며 이야기하면, 우리는 맞장구를 치며 아빠의 삼재가 얼마나 지겹게도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할 것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아빠의 시간도 괜히 맞장구를 치며 아빠의 흥을 돋울 것이다.
가족사진
‘가족사진 4만원’
시장에 새로 생긴 사진관은 처음에는 ‘증명사진 잘 찍는 집’이라고 홍보를 하더니, 이제는 ‘가족사진 잘 찍는 집’으로 노선을 바꾼 듯 했다. 문 앞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집으로 들고 들어와서 김치냉장고에 붙였다. 그러고 보니 가족사진을 한 장 찍어야 되는데. 나는 사진을 모아놓은 서랍을 열고 가족사진이 몇 장이나 있는지 세어보았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네 명이 모두 모인 가족사진이 거의 없었다. 2012년에 경주 양동마을에서 찍은 사진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거실로 나와 벽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외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외가 친척들이 모두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6년 전쯤에 찍은 사진은 모두가 젊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로 사진을 제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미리 영정사진을 찍었다. 효도사진이라지만 찍히는 부모님과 그 장면을 지켜보던 자식들의 미묘한 감정이 공간에 눅눅하게 배었다. 그 순간 이 가족사진이 이별을 준비하는 사진이구나. 하는 생각에 가족사진을 즐겁게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필연적으로 다가올 이별이었다. 한사코 다가올 이별 앞에서 가족이 모두 함께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듯이, 사진은 커다란 액자 속에 담겨서 거실에 걸렸다. 나는 가족사진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사진관에서 제대로 찍는 가족사진에 대한 이미지는 언제나 불편했다. 사진관 벽에 붙어있는 샘플 사진들은 모두가 비슷했다. 사람만 다르다 뿐이지 멋지게 차려 입은 옷에, 부모님은 자리에 앉아있고 자식들은 비스듬하게 서서 각자 어깨에 손을 올리고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은 커다란 액자에 담겨 집 입구나 거실 벽 한복판을 장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도 저런 기념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목한 가정의 상징처럼 벽에 떡하니 걸어놔야 하지 않을까.
내년이면 아빠가 60살이 된다. 엄마는 그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나이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훌쩍 다가와버린 세월에 엄마는 놀란 듯 했다. 내년에 환갑인가?라고 묻는 내 질문에 엄마는 눈을 흘겼다. 아직 모아놓은 돈도 없는데 환갑이면 아무 것도 못 해주는데 어쩌나 하던 중에 환갑이 아니라니 잘 된 일이었다. 나는 환갑이 아니라면 기념으로 가볍게 가족사진이나 찍자. 희끗희끗해져 가는 머리에 검은 염색도 하고, 단정한 양복도 사서 사진을 찍자라고 말했다. 올해부터 조금씩 모으기 시작한 돈으로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자유적금으로 조금씩 모았던 돈은 매달마다 사용처가 바뀌었다. 연초에는 강아지 병원비를 미리 모아둔다고 했다가, 여름에는 언제고 갈 내 여행자금이 되었고, 한달 전에는 가족 여행자금에 보태겠다고 하다가 결국 가족사진을 찍겠다고 정착한 것이다.
지난 번 지진을 겪고 두려움에 떨다가 지진대비 물품을 찾아보았다. 도쿄 메트로에서 만들었다는 자료를 읽으며 ‘정리해두면 좋은 소중한 물건’에 가족사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가족사진이 이별을 준비하는 것만이 아닌 다시 만날 날을 위해 필요할 물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찍어야 하는 적기가 온 듯 했다. 새로운 가족인 강아지가 생기고, 아빠의 60세 인생과 4인 가족으로서의 25년을 축하하는 해. 지금까지 함께 잘 살아왔다는 훈장처럼, 기념처럼 우리는 옷을 빼입고 사진관을 찾아갈 것이다. 어색하게 미소 짓는 사진들이 거실 벽 외가 사진 옆에 걸릴 때, 나는 또 다음 가족사진은 어디에 거는 것이 좋을지를 뒷짐을 지고 생각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