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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픔 서로 이해하는 마음 필요
작성자 홍*************** 작성일 2014-07-11 조회수 2035

최근 TV를 보면 일본의 혐한 데모나 넷 우익에 관한 소식이 적지 않다. 대학졸업 후 12년간 일본에 유학하며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했고, 한 일본인 집에 10년이나 살며 많은 신세를 졌기에 마음을 깊이 나눈 일본인 친구들도 많은 나이지만, 이런 소식을 접할 때면 상당히 불쾌하고 화가 난다. 한국/한국인에게 일본/일본인은 무엇인가? 나는 작년 1116-25일까지 10일간 일본정부의 초대를 받아 한국대학생 방일연수단의 부단장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국인 나의 일본]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재일교포 통역사들의 NPO단체 日中韓에서 세계로가 기획, 진행한 한국대학생 방일연수단은 21C 유스 조선통신사-평화로 가는 길-이라는 테마로 한국에서는 대학생 46명 등 50명이 참가했고(울산대는 일본어일본학과 이인제, 경찰학과 이현석), 일본에서는 일본워킹협회원 등이 참가했다. 단적이기는 하지만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존재와 의의를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 일본인, 재일교포 참가자가 함께 생각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한일관계 회복의 상징으로 1607-1811년까지 12회 일본에 갔다(임란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여기서는 임란 이후의 것만을 칭함). 연수단의 일정을 조선통신사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아래와 같다.

2일 째 교토에서는 한 재일교포가 땀으로 만든 고려미술관에서 조선통신사-에도 일본의 성신외교(誠信外交)(岩波新書2007) 등 조선통신사 연구로 유명한 나가오 히로시(仲尾宏) 교수님에게 강의를 들었다. 초기 조선통신사의 역할은 임란포로 귀환으로 정치적으로 엄중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그 회를 거듭함에 따라 한일간의 큰 문화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쾌적한 여행을 위하여 한 번에 4,5백명 이상의 숙박시설(주로 절 등에서 머물렀으나 없을 때는 임시거처를 만들기도 했다)과 음식(당시 육식을 하지 않던 일본에는 고기가 없어 식량조달이 어려웠다.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을 위한 고기가 있었던 나가사키에서 교토 근교의 히코네까지 살아있는 돼지 수십 마리를 배로 옮겨왔다)을 책임져야 했던 각 지방의 이야기, 학자와 의사, 화가 등에 의한 지식과 학문, 사상의 교류의 장이 되고 또한 당시에 통신사의 방일에 관련된 그림과 책자까지 출판 판매되었었다는 이야기 등. 그는 강연을 조선통신사가 있었던 시기에 한일관계는 평화로웠다고 맺었다.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실제로는 어떠했는가 하는 학문적인 의문은 뒤로 남겨두고 그 말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 남았다.

3일 째는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오미하치만(近江八幡) 근처의 조선인가도를 걸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川장군들과 조선통신사들만이 이 길을 사용했다고 한다. 3시간이 넘도록 걸으면서 어느 새인가 침묵하게 되고 오래 전 조신통신사가 깃발을 휘날리며 이 평원을 지나갔을까? 생각한다. 설명할 수 없는 아련함이 전해져 온다.

5일 째인 시즈오카(?岡)의 세켄지(?見寺)에서는 일본 최초의 외국인 정교수 재일교포 김양기(金兩基, 1933년생) 교수님께서 한복을 입은 재일교포 할머니들과 기다리고 계셨다. 이 절에는 조선통신사가 5번이나 머물렀기에 현판 등 조선통신사가 남긴 작품이 많았는데, 김양기 교수님은 90년대까지도 조선통신사가 쓴 글인지 몰랐던 것을 세상 밖으로 꺼내는 큰 역할을 하셔서 현재 이 절은 일본국가 사적으로까지 지정되었다고 한다.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경내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작품들의 설명을 해 나가시는데, 그의 들뜬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맑은 눈에서는 학자로서의 열정과 조국의 젊은이를 마주한 애틋한 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한일 번역자의 의견 차이로 출판에 고비를 맞았던 ?見寺所?朝鮮通信使遺物?錄가 그의 설득으로 겨우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 믿음이 없으면 되는 것도 될 수 없고, 믿음이 있으면 안 되는 것도 될 수 있다. 한일간의 믿음을 믿어 주었으면 한다’(그의 한국어를 그대로 인용)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그리고 삿타고개. 조선통신사를 위해 만든 길 삿타고개에서는 문득 후지산을 만났다. 일본의 상징이라느니 하는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는가? 오른쪽에 펼쳐진 푸른 태평양과 파란 하늘 아래 구름 그림자 속에 살짝 가려진 후지산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6일 째는 하코네(箱根)의 옛길인 고개를 힘들게 넘고 버스로 조선통신사의 목적지 에도(현 도쿄)에 도착했다.

연수단이 지낸 10일간은 또한 대학생 한국인들과 재일교포들, 일본인들이 함께 풍성한 교류를 가진 장이었다. ‘일중한에서 세계로의 대표 우시오 게이코 씨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서강대에서 유학 후 현재 통역사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또한 아사히신문사 기자 출신 일본워킹협회 회장인 엔도 야스오 씨는 지금까지 서울-부산-후쿠오카-도쿄까지 하루에 40Km를 장장 40일간 걸어서 조선통신사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행사에 몇 번이나 참가했고, 4월에도 부산-속초-서울까지 걷는 행사에 참가한 한국통이시다. 우리에게 아리랑과 일본동요 고향을 함께 부르자고 제안하고 우리 대학생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리고 일일이 쓰지 않겠지만 한국인 학생들 또한 저마다 생각하고 느끼고 배운 것이 많았으리라.

한수산은 벚꽃도 사쿠라도 봄이면 핀다(고려원, 1995)에서 문화는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라고 말하고, 노성환은 일본의 민속생활(민속원, 2009)에서 일본을 순수하게 바라다보려는 시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지각변동이 없는 한 영원한 이웃일 수밖에 없는 한국과 일본. 일본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나갈 것인가?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1, 조선통신사: 임란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여기서는 임란 이후의 것만을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