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멈추지 않는 도전시대 | |||||
작성자 | 강** | 작성일 | 2011-10-05 | 조회수 | 6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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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많은 도전이 난무하는 도전시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 무모한 도전에서부터 누가 봐도 무리한 도전을 시도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는 안전을 추구하던 과거와 다른 현재의 모습이다. 이런 도전을 하는 이들의 목적은 각기각색이다. 기네스북이나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는 등 명예를 추구하는 이가 있는 반면 막대한 부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 붓는 이들도 있다. 요즘 도전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TV프로그램이 많다. 본래 직업을 포기하면서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는 그들의 드라마는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자랑한다. 하지만 도전이란 처음에 시도하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오프라 윈프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성공의 힘은 항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란 말을 했다. 도전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극복하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하겠다는 강한 믿음으로 지금까지 살아 온 3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들의 열정과 포부를 들어보고 우리도 해보고 싶었지만 참아왔던 것들에 도전해 보자. 그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신선하고 즐거운 충격이 될 것이다.
중국소녀 4인방의 한국체험기 한국을 알고 싶어 직접 찾아온 교환학생들 귀엽게 생긴 여학생 4명이 쪼르르 방안으로 들어왔다. 진아운(22), 단설경(22), 유연(22), 진몽진(22) 모두가 중국의 교류학생이지만 하나같이 모두 예쁜 한국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우리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에 기자는 외국인이라는 이질감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그들은 중국의 원난성과 강서에서 꿈을 가지고 한국에 왔다. 그리고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에서 2년 동안 한국어 공부와 문화를 공부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와 한국을 알기 위해 교류학생으로 온지 3주 정도가 지났다. 그들 중 몇몇은 교사와 유명한 CEO가 되고 싶어 대외중국어교육을 공부하고 있으며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 한다. 우리 대학교에서 진행되는 수업들은 모두 한국어로 실시된다. 처음에는 중국어와 한국어의 문법이 달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국어는 주어+목적어+동사로 되어있는 문법적 구조인데 반해 중국어는 주어+동사+목적어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국어문법을 배울 때보다 한국에서 국어문법을 배우는 것이 이상하게 더 어려웠다. 많은 공부 끝에 국어문법을 조금 알게 됐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서로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부연설명을 해주는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의사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것 말고도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들은 “우아하며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추는 한국무용을 꼭 배우고 싶다”며 “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방법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그들은 전통문화와 전통음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한국을 좋아했지만 이국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음식에서 그러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신기하고 맛있게 느껴졌지만 날이 갈수록 타국 음식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그들은 “생각했던 것 보다 맵지 않고 담백해서 입맛에는 잘 맞았던 것 같다”며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는 것이 부담스러워 졌고 중국음식이 그리워졌다”고 말했다. 때때로 고향의 음식이 그리울 때면 여가시간에 중국요리를 먹으러 갔다. 평소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에서의 생활동안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말해줬다. 중국에서는 술을 마실 때 어른과 함께 있어도 서로 마주보며 술을 마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술을 마실 때 어른과 있게 되면 반드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술문화에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며 “중국과 너무 달라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여러 명소를 여행하고 싶어 했다. 그 중에서도 서울과 제주도를 뽑았다. 대한민국의 중심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제주도를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했다. 또 그들이 살고 있던 고향에서는 눈을 쉽게 볼 수 없어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를 가고 싶어 했다. 강원도에는 눈이 사람 허리까지 온다는 말에 매우 설레어하는 눈치였다. 한국에는 1년 후까지 있을 예정이고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많이 공부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친구를 많이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기자에게 “혹시라도 중국어가 배우고 싶어지면 우리를 찾아 와라”며 “한국 친구들과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우리와는 다른 몸으로 우리보다 더 큰 꿈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윤여현을 만나다. 우리 대학교에서 버스로 약 1시간 떨어져 있는 곳에 울산장애인 자립생활센터(이하 자립센터)가 있다. 자립센터는 울산지역 장애인의 권익옹호와 역량강화, 자립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윤여현(37)씨가 자립센터 앞에서 웃으며 반갑게 맞아줬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그의 모습은 불편한 내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마치 가을의 싱그러운 햇살을 담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17살까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4층에 위치한 그의 집은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던 그의 발을 묶어놓기에 충분했다. 17년 동안 방안에 갇혀있던 생활에서 벗어 나기위해 고향인 울산을 떠나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의 한 장애인복지시설에서 컴퓨터를 배우고 검정고시 공부도 했다. 이곳에서 5년을 보낸 후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의 10년은 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울산의 거리에서 그는 신기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서울의 거리에서는 그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울산은 전국에서 복지수준이 꼴찌다. 울산시청에서는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가 잘 이뤄진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이런 현실 때문에 장애인들이 밖으로 잘 나오지 않기에 이들의 수가 다른 지역에 비해 적다고 느껴진다.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자립센터에서 3년째 근무 중인 그는 처음에 일반사람들이 다니는 직장을 다니고 싶었으나 중증 장애를 가진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많지 않았다. 여러 곳을 찾던 중 이곳에 정착해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정부에서 회사들이 의무적으로 전체 근로자수의 2%를 장애인들로 고용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했지만 전혀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오히려 회사 측에서는 장애인들을 고용하지 않는 데에 부과되는 벌금을 내는 편이 이익이라고 생각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의 주요 업무는 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고 상담해 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권익옹호와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자신이 했었던 일들 중 뜻 깊었던 사건 하나를 이야기 해줬다. 과거 울산시청 건너편 외환은행 앞에는 20개 정도의 계단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그 계단은 넘기 힘든 큰 산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한달 내내 외환은행으로 찾아가 경사로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의 노력 끝에 20년 동안 없었던 경사로가 생겼다. 최근 취미생활로 사진촬영을 배우고 있다. 그는 취미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취미생활을 가지는 것에도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것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아직 힘들다”고 말했다. 사진촬영을 배우기 전 20년 동안 꾸준히 보치아라는 스포츠도 했다. 보치아는 장애인올림픽 종목 중의 하나로 선수들이 공을 경기장 안으로 굴리거나 발로 차서 표적구에 가장 가까이 가게 하는 운동이다. 이는 장애인올림픽의 효자종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3년 전까지 선수로 생활하다가 최근에 코치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일과 취미 모두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그의 인생 좌우명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이다. 그는 “장애인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일에 한계가 있지만 이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에서의 10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시간이었다. 인쇄소 전산실, 게임업체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인천의 기술원에서 배웠던 편물기술을 이용해 장갑공장에서도 일을 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것은 건축이었다. 1999년 서울에서 오토캐드라는 설계프로그램도 배웠고 현재의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건축 공부를 더 하고 싶어할 만큼 관심이 많았다. 장애인은 장애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장애를 안고 있다고 해서 도전의 길을 가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틀린 정답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들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면 일단 막아서고 본다. 하지만 실패도 경험이다. 그 길로 직접 가본 후 판단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는 “과거의 다양한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며 “이제 이 경험을 토대로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집에만 갇혀있게 하지 않겠다”고 했다. 덧붙여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학창시절을 제대로 즐기며 인생을 즐겁게 살아나가도록 돕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다”고 힘차게 말했다.
내 인생의 안다리, 실패를 들어 메치다 울산대 씨름부의 명예를 이어나갈 서경진 학우를 만나다. 우리 대학교 씨름부 소속의 서경진(22) 학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저 멀리서도 한 눈에 보이는 큰 체구는 그가 씨름부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씨름장에 들어오는 듯한 늠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처음 씨름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큰 덩치를 가진 그는 아버지의 초등학교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씨름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씨름에 대해 “축구와 농구, 야구 등의 운동보다 몸으로 다양한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며 “이 움직임을 기술로 만들어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에 매력이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씨름이라고 하면 비인기종목이며 축구, 야구와는 달리 크게 전망이 없는 운동으로 생각한다. 이런 씨름을 하는데 부모님과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그의 열렬한 팬이 돼 응원했다. 그의 하루일과는 일반 대학생보다 일찍 시작된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새벽 5시, 체중조절을 위해 우리와 다른 식사를 한 후 운동장을 달리는 등 기초체력운동을 한다. 대학 공부와 체계적인 씨름을 배우기 위해 대학교를 진학하게 됐다.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 후 오전에 받는 학과 수업은 우리 대학교와 체육관을 오고가는 시간 때문에 결석하기 일쑤다. 오후엔 씨름부원 모두가 같이 모여 씨름연습을 하고 저녁엔 개인적인 운동시간을 가진다. 운동으로 아침을 시작해 운동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는 일상도 이제 10년이 지나고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좌우명처럼 살아온 결과 초ㆍ중ㆍ고등학교 시절 라이벌에 가려진 2인자에서 대학교 입학 후 1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많은 경기에서 1등을 하는 등 화려한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할 때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서경진 학우도 마찬가지였다. 10년 동안 힘들고 어려운 적도 많았지만 한번도 포기한 적은 없었다. 단지 연습한 만큼의 실력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입상해야 한다는 큰 압박을 느꼈다. 힘들 때 마다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도와주는 부모님과 고민을 들어 주며 정신적 지주가 된 김재곤 감독님 등 많은 이들의 응원이 있었다.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을 도와준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했다. 끊임없는 노력과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많은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덕분에 여러 대학교의 씨름부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더 좋은 다른 대학교들을 제치고 우리 대학교를 선택했던 이유는 다양한 연습파트너에 있다. 다른 대학교의 씨름 선수들은 그들끼리만 연습을 하는데 비해 우리 대학교는 학외 다른 선수들과도 훈련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운동 환경과 시설이 좋아 우리 대학교를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됐다. 이처럼 많은 이점이 있고 근래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한 ‘울산대학교 씨름부’는 여전히 우리 대학교 학우들에게 생소한 말이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이유는 씨름부 선수들이 학내에서 씨름 하는 것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우들은 씨름을 재미없고 지루하며 덩치가 큰 사람들이 나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그는 “요즘 씨름엔 흥미롭고 역동적인 동작이 많아 과거보다 화려하다”며 “또 시간을 지체하면 경고를 주는 제도가 생겨 예전보다 더 흥미진진해지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문화관광부에서도 씨름을 지원해주고 있고 외국선수들을 초청해 경기를 하고 있다. 씨름과 비슷한 종목이 있는 다른 여러 나라들에는 전용경기장이 있는데 한국엔 씨름전용경기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수원과 진평에 전용경기장을 짓고 있다. 이제 씨름이 발전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는 “씨름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우리 대학교에 있는 한 우리 대학교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며 “지원을 해주고 관심을 가져주신데 좋은 경기로 보답 하겠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