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77일 동안 회사를 상대로 격렬하게 공장점거 농성을 해오던 쌍용차 노조가 사측과 극적타협을 이뤘다. 사측은 ‘60(정리해고) 대 40(무급휴직)’이던 해고자 대책을 ‘52대 48’로 수정했고 노동자는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농성자중 52%가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승패를 따지자면 농성자는 한 명도 해고할 수 없다던 노조의 패배로 끝이 났다. 한참 파업이 진행되던 중 필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쌍용차 파업’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노조측을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전원수용이 가능하냐며 너무 오랫동안 파업을 한 노조를 비난했다. 이전의 공무원 노조파업, 대구 지하철노동자 파업, 화물연대 파업 , 의료직 파업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을 하지 않고 파업을 한다고 비난하기 일수거나 그 파업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불편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언론보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의 파업이 불법파업이라는 측면만 강조되며 어떤 무기를 파업에 동원했는지만 중요하게 다뤄졌다. 어떤 언론에서도 ‘노동자들이 왜 파업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런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는지’, 즉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노동자 파업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하종강 소장의 강연을 통해 조금 이해가 됐다. 우리나라는 ‘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인식부터가 잘못됐다고 한다. 혹시 혹자들은 ‘노동자’와 ‘근로자’의 차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노동자’는 고용계약에 의해 자기의 노동을 상품으로 제공할 자유가 있으며, 고용주인 자본가에 대해 법률적으로는 대등한 입장에 있어서 신분적인 구속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근로자’는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것처럼 임금의 수입에 의존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 또한 우리나라 국가기관이 근로부가 아니라 노동부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근로자’는 우리 자신을 낮추는 표현이다.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노동운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된 이유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사회의 불합리적인 구조에서 비롯됐다. 일제시대의 잔재가 올바르게 청산되지 않은 채 친일파 후손인 이승만 정부가 통치를 시작했다. 이후 군사 독재 정권이 계속해서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등 백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집단이었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문제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인력을 어느 곳에서도 양성하지 않았다. 현재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파업이 불법파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른 나라 어느 곳도 우리나라만큼 노동문제에 대한 시각이 열악한 곳은 없다. 외국에서는 어느 한 사람도 파업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 모두가 파업하는 사람들의 권리주장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문제에 대해서 이해해주는 국민정서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외국에서는 특정직업, 계층을 막론하고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국민들 모두가 노동운동을 자신의 권리를 찾기위한 올바르고 정당한 권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한편 지난 26일부터 금호자동차도 직장폐쇄조치를 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우리 모두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볼 때 불법파업이라는 점보다는 그 사람들이 왜 파업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생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뿌리박혀 있는 인식의 작은 전환은 지금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다.
임민지 편집국장(화학공학·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