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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강의의 주인 된 자는 누구인가?
작성자 편** 작성일 2009-09-01 조회수 1080

  대학은 어느덧 새로운 학기에 접어들고 있다. 이 때쯤이면 대학의 구성원들에게 강의는 새로운 도전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것이 새로운 도전이기에 강의는 강의자나 수강자 모두에게 기대와 부담이 반반 섞여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강의를 여는 강의자든 그것을 받는 수강자든, 강의를 평안한 마음으로 맞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새로운 도전에서 강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는 따로 있다는 점이다. 강의의 주인 된 자는 강의의 머슴  된 자와 짝을 이룬다. 그러므로 누가 강의의 주인 된 자이며 누가 강의의 머슴 된 자인가?


  최근 변종 인플루엔자와 관련해 언급되고 있는 ‘바이오 주권’의 경우, 그 주인 된 자와 머슴 된 자는 각각 누구인가? 이른바 ‘바이오 주권’은 국민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가 질병 치료에 필요한 백신과 필수의약품을 확보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리고 국가가 행사하는 그 주권은 원래 국민의 것으로서, 단지 국민이 자신의 건강을 보호하도록 국가에 빌려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바이오 주권’의 경우, 주인 된 자는 국민이며 머슴 된 자는 국가인 것이다.


  바이오 주권이 있다면, ‘강의 주권’ 또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의 주권’은 ‘바이오 주권’에 비하여 주인 된 자와 머슴 된 자가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최근 교육계에 널리 퍼져있는 ‘수요자 중심 교육’, ‘기업 맞춤형 교육’ 등의 경제 비유에 전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라면 그는 강의의 주인 된 자는 당연히 강의자인 교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대답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철두철미 앞의 ‘경제 비유’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그는 강의의 주인 된 자는 수강자인 학생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이라면, 우리는 어느 한 쪽은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릇된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손쉬운 결론이요, 위의 질문의 의의를 묵살해버리는 불행한 결론이다.


  ‘발견은 탐구하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목하의 질문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강의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일은 탐구의 열정을 가진 준비된 자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강자에게 그러한 탐구의 열정이 없다면, 강의자의 아무리 좋은 강의도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다. 물론 이 말은 강의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강의자에게 탐구의 자세가 없으면 그의 강의는 그저 물건을 택배하듯이 수강자에게 정보를 이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경우 그의 강의를 듣는 수강자가 무엇인가를 배우기를 바라는 것은 애당초 지나친 기대다. 요컨대 강의자와 수강자는 모두 발견을 위한 탐구라는 그 동일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강자가 탐구의 열정을 저버린 채 강의자의 탐구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바쁘면, 그는 강의의 머슴 된 자일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강의자가 자신은 탐구를 게을리한 채 남이 만들어 놓은 탐구결과만을 수강자에게 전달하기에 급급하면 또한 언제나 강의의 머슴 된 자이다. 그러나 이제 강의자와 수강자 모두 탐구의 대열에 서서 그들 모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 탐구의 동일한 길을 걸어간다면 그들은 모두 진정으로 강의의 주인 된 자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강의의 주인이 되는 방법은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그러나 또한 그 방법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잘 보지 못하고 또 보려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