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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긍정하는 삶을 노래한 책
작성자 편** 작성일 2009-03-03 조회수 3671

  니체는 총 4부로 짜여진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년)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나의 작품 중에서 ‘차라투스트라’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으로 나는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물을 안겨주었다”(『이사람을 보라』, 서문).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고 있는 ‘제5의 복음서’라고도 했다. 어떻게 그는 이런 말들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을까? 


  차라투스트라가 나이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 속 동굴에서 십여 년 동안 내공을 쌓은 후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하산하면서 『차라투스트라』는 막을 올린다. 차라투스트라가 동굴에서 깨달은 달콤한 진리란 바로 ‘신의 죽음’과 ‘초인의 탄생’ 그리고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선물로 전하고 싶었지만 무시당했고, 결국 그는 저 높은 산과 저 깊은 계곡을 수없이 오르내리면서 각양각색의 동물들과 인물들을 만나 자신의 깨달음을 말하고 또 말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에는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도덕, 신체, 열정, 범죄, 읽기와 쓰기, 전쟁, 국가, 죽음, 우상, 시장, 순결, 여자, 친구, 이웃, 창조, 혼인, 행복, 연민, 사제, 춤, 교양, 학자, 시인, 예언자, 처세, 사기꾼 등 실로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다루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전파하려 했다.


  차라투스트라』에 맨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신에게 바칠 찬송가를 준비하고 있는 성자를 차라투스트라가 만나는 장면이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늙은 성자는 그의 숲속에서 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이때 신이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제 우리가 하나의 신, 하나의 진리, 하나의 법칙, 하나의 도덕, 하나의 이상, 하나의 이성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의미다. ‘신의 죽음’은 더 이상 어떤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것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자기 외부의 가치 기준에 복종해 온 인간이 드디어 노예적 생활을 끝내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운명’을 알리러 온 복음의 사자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과 동시에 ‘초인의 탄생’을 예언했다. 스스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끝임 없이 자기를 극복하고 고양시키려는 ‘초인’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특히 보다 높은 것을 향한, 보다 고귀한 것을 향한 경쟁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존중할만한 적을 찾으라고 했던 것이다. 멋있는 적과 경쟁할 때 나도 그 경쟁 속에서 멋있어지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생물학적인 자기보존이나 물질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최후의 인간’의 삶을 경멸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 있다고 말이다. 죽음과 마주했을 때 내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나는 내가 살아왔던 그대로 다시 반복해 나의 삶을 살겠노라고 말할 수 있도록, 어떤 부정이나 변명도 없이 자신의 온 생애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삶에 대해 말했다. 이는 삶의 매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삶일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된 자,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자가 바로 다름 아니라 초인인 것이다.


  니체의 글은 결코 쉽게 접근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은 근대의 논리적 개념적 사유를 거부하고 있으며 온통 은유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이란 부제를 달았듯이, 니체는 만인이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주기를 소망했지만 아무나 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책은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고 싶지는 않은 책인 것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거창하게 인류의 구원을 모색하지는 못한다 해도, 그를 친구 삼아 삶의 자극을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이는 대학의 지성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가 아닐까?


글_이상엽(철학) 교수